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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베케트와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


소극장 티켓박스가 공연시작 30분 전부터 북적댔습니다. 좋은 좌석이 탐나 일찌감치 발걸음을 옮겼건만 보조석에 앉게됐습니다. 그나마도 조금만 더 늦었으면 등받이 없는 보조석에 앉을 뻔 했죠. 낯선 광경이었습니다. 연극, 그것도 부조리극, 코미디도 아니고, 멜로도 아니고, 대학로가 아닌 신촌에서 올려지는 평일 공연인데도인산인해를 이루다니 말입니다.

물론 "고도를 기다리며"는 굉장히 유명한 작품입니다. 대표적인 부조리극으로 꼽히는데다 사무엘 베케트는 이 작품으로 노벨상까지 수상했습니다.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고도를 기다리며"로 꼽히지요. 그렇지만 이렇게 작품성으로 유명한 연극들은 보통 관객들이 은근히 두려워하게 마련인데요. "고도를 기다리며"는 관객을 잡아끄는 뭔가가 있는 모양인가보다 하면서 극장에 들어섰습니다.

우린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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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 인물들은 우스꽝스럽습니다. 쓸데 없는 말과 행동을 반복합니다. 그나마도 진득히 하지 못하고 삼천포로 빠지기 일수입니다. 남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합니다. 바로 직전에 자신이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하지도 못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집착합니다. 나름대로 진지하며 고민도 하고 사색도 하는 것 같지만, 어째 다 헛소리로 들립니다. 마치 럭키가 생각한다고 하며 내뱉던 그저 어려운 단어만 나열해 놓은 대사처럼 말이죠.

고고와 디디는 뭘 하고 있었는지 모를 때마다 "고도를 기다려야지!" "아~ 그렇지~" 라는 대사를 기계적으로 내뱉으며 안도할 뿐입니다. '고도를 기다린다'는 건 고고와 디디의 인생목표라고 볼 수 있죠. 하지만 그들은 고도를 왜 기다리는지, 고도를 만나면 뭘 할건지 조차 모릅니다. 심지어는 고도가 누군지도 모르죠.

근데..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왜 사는지 모른채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처럼 살아가고 있는건 아닐까요? 대부분 이루고자 하는 일생의 목표는 있을겁니다. 하지만 왜 이루어야 하는건지, 이루고 나면 뭘 할건지 모른채로 생각없이 살아가고 있는건 아닐까요? 그냥 '난 목표를 향해서 열심히 살고 있어!' 라는 안도감을 위한 목표는 아니었을까요?

우린 제대로 알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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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는 어제 맞지 않아 버려놓았던 신발을 오늘은 꼭 맞는다고 맘에 들어합니다. 하루만에 장님이 되어 돌아온 포조는 오래전에 장님이 됐다고 말합니다. 대체 왜 이런 바보같은 착각을 하는걸까요? 인간이란게 이렇게 멍청한걸까요?

하지만! 이것 또한 디디의 시각이거나 혹은 관객의 시각입니다. 신발이 바뀌었을 수도 있고, 신발을 벗어둔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죠. 시간이 단지 하루만 지난게 아닐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어제 만났던 포조와 오늘 만난 포조가 다른 사람일수도 있고, 어제 만났던 포조도 사실 장님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뭐가 진짤까요? 누가 착각을 하는걸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건 전부 사실일까요? 아마도 아닐겁니다. 누구나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체적으로 필터링을 하니까요. 근데 진짜 사실을 알수는 있는걸까요?

알아채면 뭐가 달라지긴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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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일순간 디디는 뭔가 잘못됐다는걸 깨닫습니다. 우리 모두는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고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하다는 걸 깨닫죠.

하지만 디디는 계속 고도를 기다립니다. 작은 깨달음을 얻었지만 본질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고도가 아니면 왜 살아야하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일까요? 알아도 벗어날 수 없다? 몰랐으면 행복하기라도 했을텐데.. '모르는게 약이다' 란 말은 이럴 때 쓰는걸까요? 불현듯 영화 "매트릭스"가 떠오릅니다.

인생은 허무하다?


인생의 허무함을 이야기 하려는 것일까요? 사는 것에 대해서 좀 더 넓고 높은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크게 보면 의미 없는 일에 매달려서 아둥바둥 살지 않으려면 말이죠. 인생은 짧은 거니까요.

참 어려운 작품이지만 여러번 음미할 수록 깊은 맛이 날 것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우리네 사는 모습을 떠오르게 하니까 말이죠. 이래서 관객들을 끄는 힘이 생기나 봅니다. 기회가 되면 또 보고 싶네요.


위 포스트에 쓰인 이미지는 모두 인용의 목적으로 쓰였습니다.
이미지들에 대한 권리는 극단 산울림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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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31 00:34 2009/10/31 00:34


  1. 아르테미스
    2009/10/31 05:50
    연극을 많이 보러 다니시나봐요~?
    부럽습니다.
    전 촌에 살아서 문화적 혜택을 못보고? 산다는 ㅎㅎ
  2. larara33
    2009/10/31 10:10
    잘 읽었습니다. 한국에서 하는 '고도'도 보고 싶네요. ^^
  3. 탐진강
    2009/10/31 10:58
    연극에서 참으로 오래 인기를 끌고있는 작품 같습니다.
    연극도 즐기는 문화가 더욱 활성화되었으면 합니다.
    • basecom
      2009/10/31 11:42
      네~ 연극을 즐기는 문화가 더 활성화되면 좋겠어요. 영화나 TV 못지않은 즐거움이 있거든요^^
  4. 저공비행사
    2009/10/31 12:16
    트랙백 타고 달려왔습니다. 여기는 대구인데, 공연이 순회하는지 궁금하네요
    부럽습니다. 읽고난뒤 연극으로 보고싶었거든요 ^-^
    • basecom
      2009/10/31 12:52
      전용 극장이 있는지라 보통은 전용 극장에서 하는 것 같습니다. 올해 의정부에서 공연을 한적이 있긴하네요. 이렇게 좋은 작품은 전국순회공연 다녀도 좋을 것 같습니다^^
  5. parama
    2009/10/31 12:54
    연극에 대한 글이 많네요. 사실 저는 연극을 한번도 보러가본적이 없어서 무조건 부럽기만 합니다 ㅋㅋ
  6. 윤서아빠세상보기
    2009/10/31 13:43
    어린 시절 TV를 통해 몇 번 본적은 있어도
    실재 연극으로는 못 봤네요
    또 기회가 생기겠지요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basecom
      2009/10/31 19:43
      연극은 TV로 보는 거랑 실제로 보는거랑 천지차이에요. 연극의 생명은 현장감이에요. 뭐라 설명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보시면 무슨 말인지 아실거에요^^; 꼭 직접 보실 기회가 생기길 바랄게요!
  7. 박드번
    2009/11/02 01:05
    저도 이 연극 보고싶었는데 의정부 예술의 전당인가 거기서 하지 않았나요? 멀어서 못봤었습니다. 아쉬웠어요!
    • basecom
      2009/11/02 01:09
      의정부 예술의 전당에서도 한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신촌에 있는 산울림 소극장에서 봤어요^^; 보니깐 매년 레파토리로 신촌에서 하는 것 같은데 기회되면 꼭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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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진화한 거북이? 기발한 상상에서 시작하는 공연!

단군신화에서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인간이 됐다면, "다윈의 거북이"의 해리엇은 가스 같은 오염물질을 마시고 인간이 됐습니다. 완전 닌자거북이죠. 그와중에도 거북이들의 특권인 장수 능력은 변하지 않아서 200년의 역사를 직접 체험하게 된다는 설정입니다. 해리엇이 직접 체험한 역사를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이 이 연극의 내용입니다.

실제로 해리엇이란 거북이가 존재했답니다. 다윈이 진화론 연구를 위해 갈라파고스 섬에서 데려온 거북이들 중에 가장 오래산 거북이라고 하네요. 지난 2006년에 175년을 살고 숨졌답니다. 그걸 모티브 삼아 이런 작품을 쓴 후안 마요르가라는 작가가 대단해 보이네요. 이 작품으로 굉장히 권위있는 상도 수상했다고 합니다.

극의 시작, 발상은 기발하고 대사 또한 위트가 넘칩니다. 사용된 음악들도 굉장히 경쾌하고 귀여운 느낌입니다. 그런데 내용은 무겁고 불편합니다. 보는 내내 웃음이 가시지는 않지만 동시에 불편함도 가시지 않아요. 인간을 굉장히 냉소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구제불능에 이기적인 동물?!

지난번 "도쿄노트"부터 인간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작품을 두 개 연달아봐서인지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결국 저도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을 나쁘게 말하면 기분이 나쁜건 어쩔 수 없나봅니다. 동시에 거북이에서 진화했건 말건 결국은 해리엇도 이젠 인간이며, 극을 쓴 작가 역시 인간인데 어찌 이렇게 인간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가! 하는 반발심마저 생깁니다. 확실하게 이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는 잘못된거야! 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해리엇은 유럽의 현대사 중 잘못된 부분을 이야기 해줍니다. 사실 현대사를 잘 몰라서 좀 더 풍성한 감상을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딱 맞는거죠. 그래도 지루하진 않더군요. 아무래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들려주는 거니까 잘 모르면 지루하단 얘기가 많았는데, 참 이야기를 잘 하더군요. 배우들의 연기와 발성이 수준급이었습니다. 감탄하면서 봤어요.

인간의 역사=이기적=자기중심적. 역사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전 이렇게 받아들였습니다. 인간의 문명은 계속해서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과학이건 사상이건 정치건 말이죠. 근데 그건 다 자기만을 위한 거였습니다. 자기 좋을라고. 말이야 거창하게 우리 모두를 위해서 라고 했지만 결국엔 자기만 좋을라고 하는 거였다는 거죠. 그래서 자연도 파괴하고 전쟁도 일으켜요. 공산주의도 취지는 좋았지만 실패한 이유를 거기서 바라봅니다. 결국 인간은 다같이 잘사는 길을 택하지 않는 다는 거죠. 자기가 조금이라도 더 잘사는 길을 택해왔다는 거죠.

해리엇은 아주 냉소적으로 말합니다. "난 지금껏 인간이 역사를 통해 배우고 발전하는걸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어요!" 피해자나 노동계급이나 다 똑같다는 겁니다. 결국 상황만 바뀌면 바닥의 슬픈 경험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다 자기만을 위해 가해자로 돌변한다는 겁니다.



역사는 지금도 진행중

이 연극이 아주 기분 나쁜 소름을 돋게 하는 점은 인간의 이기심은 현재도 진행 중임을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너무나 현실적입니다. 극중에서 해리엇의 이야기를 듣는 역할을 맡은 교수, 교수아내, 의사 모두 뉘우침이나 깨달음 따위는 없습니다. 그냥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할 뿐입니다.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강요하고 생체실험을 하고 돈 벌 궁리를 합니다. 특히 교수아내가 이기심을 드러내는 부분은 나름 쇼킹합니다. 교수와 의사야 애초에 목적을 지니고 해리엇에게 접근했지만 교수아내는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교수아내는 피해자에 속했습니다. 하지만 해리엇으로 인해 상황이 변하자 그 본색을 드러낸거죠.

이기심과 이익에 눈이 멀면 자기 존재 자체도 다 내던지는 걸까요? 마지막에 해리엇이 인간들을 가지고 노는 장면은 정말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문명의 발전이 인간에게 행복을 줄까?

모르겠습니다. 분명 문명의 발전은 인간에게 편리함은 가져다줬습니다. 하지만 행복까지 줬을까요? 행복을 앗아간건 아닐까요?

저는 공학을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문명 발전의 최전선에 서있다고 할 수 있죠. 어릴 적부터 공학자를 꿈꿔왔던 것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싶어서였어요. 근데 요즘은 가끔씩 흔들립니다. 이게 정말 인간을 행복하게 할까? 일단 저부터가 공학이 두려울때가 많거든요.

이제 좀 인간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작품을 찾아봐야겠어요. 힘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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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5 02:18 2009/10/25 02:18


  1. 간이역
    2009/10/26 09:52
    '다윈의 거북이'라는 제목도 특이하지만 문명의 발전이 과연 인간에게 도움이 줄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네요.
  2. basecom
    2009/10/27 00:28
    간이역님 // 맞아요. 문명의 발전이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것인지 해를 주는 건 아닌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게 해를 줬다해도 이전으로 되돌릴수는 없지요. 편함을 맛본 상태니까.. 어떻게 하면 문명의 발전이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갈 수 있을지 생각해보고싶네요^^

    방문해주셔서 감사해요~
  3. 초록누리
    2009/10/27 12:04
    문명에 이기에 대한 다른 시각을 고발하고 있는 작품같은데, 문명이라는 것이 인간을 위해 발전해 오고 있었는데 문명으로 역사가 발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의 이기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발전이었다,,이런 해석의 연극인가요?
    공학을 공부하시고 계신다니 놀랐습니다. 공학을 공부하시는 분이기에 그런 혼란은 당연하다고 생각되네요. 혼란이라고 할 것 까지는 없지만...
    천문학도들이 흔히 두 분류도 나뉜다고 들었어요. 한 부류는 우주의 중심을 자기라고 놓고 주변환경으로 우즈를 보는 부류, 그리고 다른 부류는 우주 속에 자신을 두고 먼지보다 작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한다는...님도 그런 고민도 하고 계신 것 같아요. 문명의 이기를 위한 첨단분야에 있으면서 이게 인간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를 고민해보는...
    자신의 생각을 어디에 놓느냐가 중요하겠지요. 참 진지한 고민을 하고 계신 것 같아 주절주절 말이 길어졌는데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자신을 긍정적인 역할의 선상에 두고 보는 것일 것 같아요.
    좋은 글과 연극 소개 감사합니다.
  4. basecom
    2009/10/27 14:08
    초록누리님 // 네, 제가 받아들이기론 그랬어요. 인간의 역사는 계속 반복되고 되풀이되는데, 그럼 인간이 과연 발전한걸까? 하는 생각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구요^^ 아무튼 주제가 명확한 듯 하면서도 생각할 거리가 많은 극입니다. 그때문에 공연기간 동안 이 연극에 관련한 특강도 계속 진행 중이라고 들었어요.

    긍정적인 역할을 하도록 노력해야지요~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5. by. 빛날 휘
    2009/10/27 20:49
    흠..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네요.
    사실 극의 설정과 같은 이기적인 인간을 만든건
    자본주의체제가 아닐가요?
    '돈' 이라는 물질이 없으면 인간의 가치도 전락해버리는 사회가
    인간으로하여금 '인간성' 을 포기하게 만들었죠.
    자본주의체제를 반대하는건 아니지만...
    물질적 기술적 발전보다는 사회체제의 발전으로 인한 폐해가 심한거 같네요.

    끄응... 어렵네요 ^^;;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6. basecom
    2009/10/28 16:15
    by. 빛날 휘 님 // 자본주의체제도 가장 발전된 체제라서 그런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자본주의체제가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든건지 인간이 이기적이라 자본주의체제가 나온지 모르겠어요. 약한 부분이라^^

    하여간 어렵죠. 생각을 해봐야할 부분이긴 한 것 같지만요^^ 방문해 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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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엿보기

연극을 할 때 느낄 수 있었던 재미 중 한가지는 '엿보기'였습니다. 등장하지 않는 장면에서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거죠. 무대 옆에서 막 사이로 보기 때문에 거의 옆모습 밖에 보이지 않고 그나마도 시야가 좁아서 전체를 보기는 힘듭니다. 대사 또한 약간 멀게 들리죠. 그런데 그렇게 보는 재미가 은근히 쏠쏠합니다. 아마도 엿보는 느낌이어서 그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도쿄노트는 그런 느낌을 관객들에게 주고 싶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극의 배경이 되는 미술관에서는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이러저러한 사람들이 미술관의 휴게실에 앉아서 나누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일본어라서 느낌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저 일상어로 조용조용 이야기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배우들은 굳이 자신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달하려 하지 않습니다. 얼굴을 보이려 하지도 않습니다. 특별한 내용도, 행동도 없습니다.  마치 지하철에서 옆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입니다. 지루하지만 따분한 강연을 듣는 것보단 재밌습니다. 전체적으로 묘한 느낌입니다.

뒷자리에 앉았던 터라 자막이 잘 보이지 않았던 점이 아쉽습니다. 어려운 대사가 나오진 않았지만 두 팀의 대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던 지라 따라가기가 만만찮더군요. 자막을 보느라 정작 무대를 제대로 보지 못해 안타깝더군요. '엿보기' 컨셉이라 그나마 다행이랄까요.

타조와 허경영, 88만원 세대

극의 배경은 도쿄의 한 미술관입니다. 유럽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자 작품의 훼손을 막기 위해 대신 작품을 보관, 전시하고 있는 미술관이죠. 전쟁을 피해 피난온 미술 작품들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전쟁에 대해 거의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잠깐씩 흘러가는 말로 이야기할 뿐입니다. 아무리 큰 전쟁이라도 당면 하지 않은 전쟁은 일상의 고민보다 결코 무겁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어쩔 수 없는 일'이 돼버렸습니다. 전직 반전운동가가 전쟁으로 인해 피난온 작품에 대하여 열변을 토하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타조는 적이 나타나면 모래 속에 얼굴을 파묻는다죠. 피할 수 없는 현실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눈과 귀를 가려버리는 겁니다.(사실 타조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얼굴을 파묻는 거라고 합니다만...)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너무나 가혹해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거 말입니다.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현재의 20대들은 취업을 위한 학점과 영어에만 신경쓰기에도 정신이 없습니다. 경험도 취업을 위해 전략적으로 쌓습니다. 촛불집회란 것도 해봤지만 전혀 효력이 없음도 몸소 체험합니다. 여러 가지 중압감에 눌려 바쁘게 살아갑니다. 정신이 워낙 없다보니 반대급부로 여가활동은 생각없이 시간을 죽이는 것을 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까요. 지식은 많지만 똑똑하지는 못하고, 영어점수는 높지만 영어는 못하며, 하는 일은 많지만 열정은 없습니다. 누구의 탓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20대들에겐 영어와 학점에 매달리는 것이 그나마 불안을 덜어내는 행동임에 분명합니다. 딴건 모르겠고 그것만 바라보면 될 것 같은... 그것만 생각하고 싶은... 그런거 말이죠.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허경영에 관한 내용을 방송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상했 듯 실체는 사기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생각보다 진지한 지지자가 많다는 겁니다. 순진한 할아버지 할머니 말고 젊은 세대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생겨남을 인터넷 상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잠시 바보 행세를 하는 것이고 정치적으론 뛰어난 사람이다, 현재의 대통령보다는 잘할 것 같다는 식입니다. 정말 놀라울 정도입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허황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워낙 현실이 더러우니 사기꾼에게라도 희망을 걸어보고 싶은 건 아닐까요.

굴곡없이 단편적인 이야기만 오고 가던 극은 끝난 것 같지도 않게 끝이 납니다. 관객들도 한참을 어리둥절해하다가 박수를 쳤습니다. 갑자기 답답해졌습니다. 뭔가 슬프고 씁쓸해졌습니다. 허경영, 88만원세대,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르고 사라졌지만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답이 없습니다. 그냥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필연적인 아픔쯤으로 생각하고 참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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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1 01:20 2009/10/21 01:20


  1. White Rain
    2009/10/21 17:56
    막 사이사이로 보이는 배우들의 모습...지하철에서 마주 앉은, 혹은 주변 사람을 보는 듯한 느낌이라는 점...정말 와닿는군요. 그만큼 생동감이 느껴지는 듯 하고 말이죠.
    허망한 희망이라도 꾸고 싶은 욕망.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마음, 나쁜 건 애써 외면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생각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고 싶은 마음, 꾸고 싶은 꿈만 꾸고 싶은 마음...
    아마 그런 것 같아요. 힘들수록 여유가 없어지고, 또한 그럴수록 허망한 꿈이라도 꾸고 작은 희망이라도 잡고 싶은 현대인들 같습니다. 물질의 이기이죠.
    그래서 저는 요즘, 종교적인 것과 관계없이 산사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답니다. 미래의 언젠가...그곳에서 한줌 햇빛만으로도 행복해 하는 제 자신을 떠올리기도 하지요.

    저녁 맛있게 드시고, 늘 행복하세요.
  2. basecom
    2009/10/21 18:34
    White Rain님 // 방문해주셔서 감사해요^^; 결국엔 욕심을 버리는 게 가장 행복한 길이 아닐까도 생각해보는데, 그걸 버린다는게 정말 어려운거라서 말이에요..
  3. 초록누리
    2009/10/22 00:46
    앗,,포스팅들 보니 다 제가 관심있는 영화 연극이네요.
    반가워요.
    현실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눈과 귀를 가려버린다는 것, 그리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한다는 말이 가슴에 닿네요.
    우리 모두의 비겁한 모습이 아닌가 싶어서...
    좋은 글들 잘 읽고 갑니다.
  4. basecom
    2009/10/22 21:39
    초록누리 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간을 부정적으로 보면 한도 끝도 없지만, 어쩌면 그냥 그게 인간의 모습인지도 모르겠어요. 설득의 심리학 같은 책에서도 인간의 그런 불완전성이 설득에 이용된다고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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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나다


창극을 본 건 처음입니다. 그러고보니 판소리나 마당극도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이 없네요.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아서 이기도 하겠지만 왠지 따분할 것 같아서 꺼리게 되는 이유도 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굉장히 기대를 하고 봤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창극이 갖고 있던 고리타분한 이미지보단 신선한 이미지로 다가왔거든요. 한국 전통문화와 영국 고전의 만남이라니! 뭔가 흥미가 마구마구 생기지 않나요?

정확히 어떤 의도로 기획된 공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기획 자체로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고 생각합니다. 창극의 고리타분한 이미지가 조금 벗겨지고 관심을 받게 됐으니 말입니다. 창극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외국의 고전작품을 공연한다는 게 좀 걸리적 거릴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내부적으로도 반대가 있었을 법도 하구요. 그렇지만 공연예술이란 건 어쨌건 보는 사람들이 즐길 수 있어야하는 겁니다. 단지 전통문화니까 지켜야돼! 봐줘야돼! 하는 식으로 명맥만 유지하는 건 절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획은 참 좋다고 봅니다.

기대만큼이나 즐거운 공연이었습니다. 사실 입장하기 전에 130분이라는 런닝타임을 보고 걱정이 많이 됐어요. 지루할 것만 불안함이 엄습하더라구요. 근데 전혀 지루하지 않더군요. 어쩜 소리들이 귀에 쫙쫙 달라붙는지. 역시 천상 한국인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봤습니다.

구성진, 센스넘치는 "로묘와 주리"




국립창극단의 센스는 시작부터 관객을 사로잡았습니다. 로미오->로묘, 줄리엣->주리, 몬테규->문태규, 캐플릿->최불립의 작명센스가 아주 죽여줬습니다. 이름이 하나하나 공개될 때 마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더군요. 신부님은 무당이 되고 연회장은 굿판이 됐습니다. 시대적 배경도 어찌나 잘 가져왔는지, 우리나라의 지역감정을 잘 이용했더군요.

구성진 소리와 대사들도 좋았습니다. 시작할 때부터 얼쑤~ 소리가 절로 나더군요. 라이브로 연주된 전통악기들의 소리 또한 귀에 촥 감겼습니다. 대사들도 사투리와 섞여서 아주 걸쭉한 것이 감칠맛 나더군요. 학생단체도 있는 것 같은데 수위가 좀 높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자연스러워서 좋더라구요. 하인끼리의 다툼에는 왠지 그런 표현들이 더 어울릴 법도 한 것 같았구요.

관객들이 참여하는 부분으로 더욱 신명나는 무대를 만들어낸 연출도 높이사고 싶습니다. 사실 굉장히 굉장히 큰 굿판이라고 했는데 처음에 사람이 너무 없어서 뭐가 이상하고 밋밋했거든요. 근데 그걸 관객을 끌어다 놓고 강강수월래 하면서 축제분위기를 만들더군요. 저도 나가서 놀고 싶었는데 하필 정중앙에 앉아버려서!!

그냥 형식상 신선하기만 하면 금방 질렸겠죠. 로묘와 주리의 연기도 괜찮았습니다.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잘 표현했어요. 사춘기 소년, 소녀의 모습을 말이죠. 로묘는 특히! 제가 봤던 로미오 중에는 최고 귀엽더군요.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는 이미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라서 그런지 별로 슬프진 않았어요. 슬픈 장면에서 무대에 비까지 내리게 하면서 분위기를 조성했지만 역부족이었죠. 그래서 일부러 연기핀트를 귀여운 쪽으로 맞춘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문제는 대사 전달!


진짜 대사 전달은 짜증나더군요. 창을 하면서 구성지게 부르는 건 좋은데... 뭔 소린지는 알아먹게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가뜩이나 대사도 현대어가 아닌데 말이죠. 잘 들리는 배우도 있는데 안 들리는 배우는 짜증나도록 안들립디다. 특히 중간중간 작게 떨어뜨려 부르는 부분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을 정도 였습니다. 이건 내가 외국공연을 보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자막을 보게되더군요.

편안하게 팔짱끼고 앉아서 공연을 봐도 귀에 대사가 쏙쏙 꽂혀줘야 몰입이 잘되는데 자꾸 신경써서 듣게 하고 자막으로 고개를 돌리게 하니.. 좀 그렇더군요. 그나마 자막이 제공되니 다행이었죠. 창이라는 특성상 어려움은 있겠지만 좀 더 신경 써줘야할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불만 얘기하는 김에 곁다리로 하나 더 얘기하자면, 제발 극장에서 떠들지좀 맙시다. 공연 내내 뒤에서 소곤소곤 대는 통에 짜증나 죽는 줄 알았습니다. 딴엔 조용조용 얘기한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정말 신경쓰여서 아휴!! 그리고 휴대폰 불빛으로 귀신놀이 하시는 분들도 정말 이해 불가에요. 어텐던트분들이 턱 빠지게 휴대폰 꺼달라고 하고 안내멘트까지 나오면 뭐하나요. 애들도 아니고 반항하는건지 원...

여운이 남는 탈


커튼콜할 때 배우들이 탈을 머리 위에 쓰고 있다가 인사하기 전에 탈을 벗어 놓고 인사를 하더군요. 극에서 맡은 배역을 내려 놓고 배우 자신으로서 인사를 한다는 느낌이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무대 중앙에 모여진 탈들에만 조명이 떨어지는데! 와.. 소름 돋았어요. 창극은 원래 그렇게 하는진 모르겠지만 그 장면 하나로 저에겐 여운이 진하게 남았네요.

아무튼 한국식 오페라 내지는 한국식 뮤지컬인 창극을 더 많은 작품으로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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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00:48 2009/10/18 00:48


  1. by. 빛날 휘
    2009/10/18 18:39
    한국식 뮤지컬 창극이라 ㅎㅎ;;
    시끄러웠다고 하시는데 무대가 어땠는지 궁금하네요 ^^;

    좋은 글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행복한 하루되세요 ^^
  2. basecom
    2009/10/18 23:03
    공연에 지장이 있을만큼 시끄러웠던건 아니구요. 바로 제 뒤에서 소근소근 대니까 제가 신경이 쓰여서 견딜수가 없더라구요;; 왜.. 나는 신경끄고 공연만 보고 싶은데 자꾸 신경쓰이고 대화내용까지 들리는 그런거 ㅠㅠ

    무대는 뭐 비도 내리고, 무대 앞에는 물도 있고 좋았습니다^^
  3. 소행성
    2009/10/31 00:34
    국립창극단의 <산불>은 굉장히 감동적인 작품입니다. 기회가 되시면 한 번 관람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 basecom
      2009/10/31 00:47
      국립창극단에서 산불도 하나보죠? 예전에 국립극단에서 하는 산불을 본 기억은 있는데요^^; 보고 싶네요. 어떤 느낌일지~
  4. 소행성
    2009/10/31 00:57
    같은 원작이지만 전혀 다른 느낌의 산불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워낙 희곡이 훌륭하기도 하지만 이정도 창극이면 전세계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않은 우리식 뮤지컬이죠. *^^* 아우...너무 편애 모드인가요?
    국립 창극단의 <청>도 훌륭합니다만 계속 앵콜되면서 그 빛이 바랬습니다. 그래도 안보셨다면 한번 관람해보세요. *^^*
    • basecom
      2009/10/31 01:45
      그렇군요. 산불에 창을 입히면 완전 우리 공연이겠네요^^; 국립극장에 연극보러 갈때마다 청 배너나 포스터는 본 것 같아요. 창극을 본건 이번이 처음이라.. 그전까진 관심도 없었거든요. 이제 창극도 좀 찾아봐야겠어요 ㅎㅎ 추천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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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에 발견한 명작, <스카우트>

불의의 기습을 당했습니다. 가을도 조금 타고 있고, 공부하기 전에 재충전이나 할 요량으로 신나게 웃을 수 있는 코미디영화를 고른건데 이게 가슴을 짓누르네요. 게다가 리뷰까지 쓰고 있으니 말려도 단단히 말렸네요.

그저 선동열을 소재로 한, 임창정이 나오는 야구 코미디 영화로만 알고 있었는데 굉장한 수작입니다. 왜 흥행에 실패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말이죠.(좀 뒤져보니 홍보가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자극적이지 않지만 재미있는, 된장비빔밥 같은!

영화 <스카우트>는 전혀 관련이 없는 듯한 소재를 잘 버무려서 맛을 낸 영화입니다. 이 점이 참 좋더군요. 선동열, 518, 첫사랑이라는 소재를 아주 묘하게 엮여있습니다. 까딱하다간 산으로 가버리기 딱 좋은 이야긴데요. 극본이나 연출력이나 매우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마케팅직원은 굉장히 난감했을 것 같군요. 영화 전체를 이끄는 동력은 분명히 '선동열 스카우트 이야기'에요. 하지만 진짜는 그게 아니거든요. 그렇다고해서 스카우트 얘길 빼자니 애매하고...

참 기가 막힙니다. 영화는 사랑에 관해 얘기하고, 혼란한 시대상에 비추어 인간을 얘기하는데 그 얘길 쭉 빼주는건 선동열입니다. 소재들 간에 서걱거리고 진부한 틈을 선동열이 매꿔줍니다. 플래쉬백도 너무나 매끄럽습니다. 적절한 포인트를 타고 쑥 들어갔다가 쑥 나오네요. 너무 기대도 안하고 생각 없이 봐서 그런지 여운이 장난이 아닙니다.

개그코드도 아주 딱 제스타일입니다. 조폭들이 멋지게 싸우러 들어가서 솜 날리게 베개싸움을 하고, 선동열을 줄삼아 줄다리기를 한다던지, 임창정이 선동열 아버지를 만나러 갔을 때 청혼남을 등장시켜서 '아드님을 주십쇼' 라는 진부한 대사를 빵 터지게 만드는 건 정말 맘에 들지 않을 수가 없어요. 진부할 수 있는 것들이 신선한 재미로 다가오니 말이죠. 웃기기 위해 스토리를 망쳐버리는 무리한 수를 두지도 않았죠.

사람과 사랑을 뭉클하게 이야기합니다. 근데 또 이게 은근히 담담하게 이야기해서 효과가 배가 되더군요. 아마 그 시대를 살았던 분들이라면 더 진하게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상처를 입었음을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사람의 영향 아래 있고, 사람은 시대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혼란한 시대는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었죠. '행동한 자' 뿐 아니라 '침묵한 자'와 '가해자'까지도요. 그러한 시대는 오해를 낳고 오해는 사랑을 가려요. 결국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까지도 짓밟아 놓는 것이죠. 물론 영화 <박하사탕>, <화려한 휴가>, 연극 <짬뽕> 등을 통해 많이 접해왔지만 접할 때마다 조금씩 제가 보지 못했던 부분을 보게되니 계속 가슴이 쓰리더군요.

극중 임창정은 자신의 일, 안위를 모두 버리고 사랑을 택합니다. 전형적인 히어로의 선택이죠. 하지만 마지막에 형사들에게 잡혀가는 씬에서 다시 비굴해지는 모습은 임창정을 다시 소시민으로 만들어줬습니다. 공감하기 힘든 '단지 영화 속 인물' 이 아닌 공감할 수 있는 '현실의 인물'이 된거죠.

지금, 가슴이 시키는 일이 무얼까요?

지금을 살고 있는 20대로써, 지금을 생각해봅니다. 지금도 지금 나름의 아픔이 있습니다. 정치가 안정되지 못한 시절보다는 자유롭고 풍족한 시대를 살고 있긴 하지만 우리 88만원 세대에겐 발달되고 첨단화된 현대사회가 어깨를 짓누르는 아픔입니다.

하지만 시대에 휩쓸려만 다닌다면 그저 피해자로 남을 뿐이겠죠. 임창정처럼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하렵니다. 조금 더 힘들고 어렵더라도 가슴 한 구석에 피해의식을 남기는 것보다는 아련한 추억을 남기는 것이 더 좋을테니까요.

아무튼 담백하고 담담하고 은은한 이 영화.. 참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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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04 18:15 2009/10/04 18:15


  1. whitewnd
    2009/10/14 17:31
    저는 개봉을 했는줄도 몰랐는데 그랬군요.
    누가 혹시 스카우트 얘기를 하면, 아 어떤 분이 그러는데 괜찮다더라. 라고 전해줘야겠습니다. :D
  2. basecom
    2009/10/17 01:54
    whitewnd // 꼭 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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