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본지 1주일만에 지각 후기를 씁니다. 그날의 즐거움이 사라지기 전에 빨리 쏟아버려야겠어요. 공연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몰리에르가 풍자를 즐겨하는 작가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재미는 보장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과연 17세기 프랑스 사회를 풍자한 극이 21세기 한국 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감흥을 줄 수 있을까 걱정됐거든요. 하지만 이런 걱정은 기우였습니다. 보는 사람 마다 시각이 다르겠지만 전 크게 2가지 이유로 이 극이 21세기 한국사람인 저에게 감흥을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1. 17세기 연극 스타일로 재현하려는 듯한 느낌

첫째는 17세기 연극 스타일 처럼 공연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17세기에 안살아봐서 모호한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는데, 그냥 아마도 17세기 유럽에선 그런식이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고전 느낌이 나는 그다지 크지 않은 플랫폼으로 이루어진 무대 위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등장하는 티를 팍팍내면서 등장합니다. 게다가 얼굴에는 새하얗게 분칠을 해서 광대임을 자처합니다. 의상은 영화나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17세기에 진짜 입었을 것만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무대 뒤로는 분장실이 보입니다. 의도한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배우들이 등장을 준비하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는데요. 다른 공연이었으면 분위기를 홀랑 깰만한 일이지만, 이 공연에선 그 분위기를 더 살리는 향신료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플랫폼 앞 쪽에는 앤틱한 느낌의 등 몇개가 켜있었는데요. 조명으로써는 별로 하는 일이 없었지만 분위기를 확 살려주더군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 연극이야!' 라고 대놓고 선언하고 이루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마당놀이 느낌도 좀 나구요. 예전엔 대부분의 연극이 이런 느낌이었을테지만 요샌 이런 연극이 드물죠. (오히려 이런 '너무 연극같은 느낌'을 경계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구요.) 극장도 좋은 극장이다보니 마치 17세기 프랑스 귀족이되어서 흥겹게 문화생활을 즐기는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있는 자들의 허세와 허영을 까는 풍자극을 보면서 허세를 느끼다니 참 아이러니하긴 합니다.

2. 인간의 본성은 그대로

둘째는 17세기 프랑스 사람이나 21세기 한국 사람이나 어차피 같은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인간의 본성, 특히 그 추악한 본성은 변하지 않죠. 그래서 17세기에 쓰여진 이 작품은 여전히 생명력을 갖고 있더군요.

몰리에르는 의사를 굉장히 싫어하기로 유명한데요. 공연을 보니 박사나 귀족도 굉장히 싫어했던 모양이더군요. 그 시절의 있는 계층이 어땠는지 잘 몰라서 몰리에르가 유별나게 싫어했는지 그냥 그때 그 사람들이 타락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몰리에르 작품에서 의사, 박사, 귀족들은 굉장히 우스꽝스럽게 그려집니다. 배꼽 빠질 정도는 아닌데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더군요. (오히려 눈알이 빠질뻔했습니다. 말들이 많던데 자막 보랴 행동 보랴 난리났었어요. 대사에 쓸데없는 말이 많았던게 다행이었습니다.)

"광대의 질투"에서는 박사가 주로 까이는데요. 아는 척만 하고 실제 도움은 전혀 되지 않는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무슨 말만 하면 그 말의 어원에 대해서 주욱 늘어놓고, 간결하게 핵심만 말하라는 조언조차 주욱 길게 늘여말하죠. 웃기는건 그 아는척 대장인 박사가 입을 열면 그 주위로 사람들이 서서히 몰려듭니다. 서서히 몰려오는 그림이 참 재밌습니다. 저 박사가 잘못됐다는걸 아는 사람은 무식쟁이와 관객뿐인거죠.

"날아다니는 의사"는 의사와 귀족을 한큐에 까는 작품입니다. 여자쪽 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해서 여자가 꾀병을 부리고 가짜 의사가 여자를 빼돌려서 남자랑 도망치게 하려고 시도하는 내용으로, 몰리에르의 또다른 작품인 "할 수 없이 의사가 되어"랑 거의 유사합니다. 몰리에르가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무식쟁이가 가짜 의사 역할을 하는데요. 귀족들은 그냥 꿈뻑 속아넘어갑니다. 아무리 헛소리를 해도 말이죠. 귀족이 바보라고 까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시대 의사들은 모두 알아듣지 못 할 헛소리만 늘어놓는다고 까는 것 같기도 합니다. 결국 가짜 의사임을 밝혀내는건 귀족집 하인인 또 다른 무식쟁이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웃음거리 재녀들"이 가장 길고 가장 재밌고 가장 공감이 갔었는데요. 파리의 허세와 허영에 빠져있는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된장녀 느낌이 살짝 납니다. 남자의 옷차림을 굉장히 따지고, 결혼에 이르기까지 연애소설에 나오는 과정을 로맨틱하게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몸을 치장하는데 굉장히 많은 시간과 돈을 들이며, 빙빙 돌리고 허세와 외국어를 가득 섞은 말을 즐겨합니다.

이들이 결국 귀족으로 변장한 하인들에게 된통 당한다는 내용인데요. 이 하인들은 말을 번지르르하게 하고 허세를 부립니다. 대충 아는척을 하고 대충 시를 지어보이는데도 이 여인들을 뻑갑니다. 결국 깐깐하게 다 따지는 것 같으면서도 허세만 가득찬 빈 깡통이었기에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거죠.

세 작품 모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다른 시대, 다른 공간에서 쓰여졌기에 완전한 공감을 불러오진 못했습니다만, 어느정도의 공감은 이루어지더군요. 몰리에르의 작품에 나왔던 의사가, 박사가, 귀족이, 된장녀가 우리 주변 곳곳에서 보이기 때문일겁니다. 결국 인간은 거기서 거긴거죠.

이 포스트에 쓰인 이미지는 모두 인용의 목적으로 쓰였습니다.
이미지에 대한 권리는 서울국제공연예술제, Théâtre National Populaire에 있음을 밝힙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2010/10/10 20:52 2010/10/10 20:52



  1. 2010/10/11 09:29
    남겨주신 덧글타고 방문합니다. 세종M시어터 2층에서 관람하셨군요! 시야확보나 좌석.음향 등에 있어 불편한 점은 없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답변주시면 다음번 좌석선택에 도움이 될 것같아요^^
    • basecom
      2010/10/11 20:02
      저는 2층에서도 오른쪽 맨 끝 좌석이었는데요.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시야가 가리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앞으로 가면 난간에 시야가 가릴 것 같더라구요. 제 앞 열에서 안보인다는 얘기가 들리는 것도 같았구요. 제 자리에 잘못 앉아계시던(원래 자리는 조금 뒷열이신) 분이 원래자리로 가시더니 더 잘보인다고 하시기도 하셨구요.
      시야가리는 거랑은 별개로 무대가 좀 멀어서 아쉽긴 하더라구요.

    • 2010/10/11 22:02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난간에 유의해야겠군요. 무대와의 거리..배우분장이나 표정이 볼만한 극 특성상 아무래도 아쉬움이 있으셨네요.
    • basecom
      2010/10/12 00:02
      후기 쓰려고 사진 찾다보니까 아쉬움이 짙어지더군요. 그래도 즐겁게 봤으니까요^^
  2. 영댕이
    2010/10/13 22:05
    연극에 대해서는 문외한인데

    자세한 설명을 보니 저도 한 번 도전해 보고 싶네요.
    • basecom
      2010/10/14 01:47
      그냥 즐기시면 돼요^^ 예술이긴 예술인데 이미 영화나 드라마 덕에 익숙한 예술이라서 어렵지가 않아요~
Leave a Comment

사용자 삽입 이미지

즐거운 감탄을 하고 왔습니다. 파격적으로 자연스러운 공연스타일도 그렇지만,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간직하고 있는 작품이어서 좋았습니다. 요새 인간에 대해 냉소적인 공연과 비극적인 공연을 많이 보는 바람에 마음이 무거웠는데 이 공연으로 훈훈한 마음을 품을 수 있게 됐네요.

이게 바로 진짜 리얼리즘


사용자 삽입 이미지

(C) 서울국제공연예술제, Vivarium Studio


'이래도 되나?' 혹은 '이게 뭐야??'라는 생각이 들만큼 "세르쥬의 효과"는 현실 같은 연극입니다. 무대는 소박하지만 있을 건 다 있습니다. TV, DVD 플레이어, 오디오, 책, 탁구대 등등. 진짜 과자, 피자, 와인에 진짜 자동차까지 등장합니다. 조명은 형광등입니다. 그러나 과장된 연기, 관객을 의식한 연기는 없습니다. 배우들의 얼굴보다 등판을 훨씬 더 많이 본 것 같습니다. 특별히 기승전결로 맺어지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냥 일상의 한조각을 보여줄 뿐입니다. 지난번에 본 "도쿄노트"와 비슷한 느낌도 있는데요. "도쿄노트"가 엿듣는 느낌이었다면 "세르쥬의 효과"는 벽에 구멍 뚫어 놓고 엿보는 느낌이랄까요.

세르쥬는 일요일 마다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 공연을 보여주는 것이 취미입니다. 이름도 거창하죠. "헨델 음악에 맞춘 회전효과" "바그너 음악에 맞춘 빛의 효과" "존 케이지 음악에 맞춘 레이저 효과" "빅 체스넛 음악에 맞춘 폭죽 효과"와 같은 것들입니다. 근데 거창한 이름에 비해 공연은 너무나 허접합니다. RC카에 폭죽을 꽂고 달린다거나 음악에 맞춰서 헤드라이트를 깜빡거리는 정도죠. '이게 뭥미?' 하는 어색한 공기가 객석에도, 무대에도 형성됩니다. 하지만 바로 이 일상적인 어색함, 그 어색함이 주는 간격이 이 공연의 웃음포인트이자 관전포인트입니다. 별 내용 없는 이야기지만 보는 내내 킥킥거릴 수 있었습니다. 간간히 폭소도 터지구요. 어쩜 이렇게 만들 수 있는지. 연출자의 연출력과 세르쥬의 연기력이 놀라울 뿐입니다.

세르쥬의 친구들은 한국에 와서 모집한 일반인들이라고 합니다. 언제나 공연하는 도시에 가서 친구들을 모집한다고 하네요. 연습도 거의 안했고 특별한 대사도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연극적 연기가 아닌 일상의 모습이 나올 수 밖에 없겠죠. 세르쥬가 친구들을 어찌나 멋지게 받쳐주던지 전혀 튀지가 않더군요. 세르쥬도 일반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로 말이죠. 이런 연기가 더 어려운 법인데 대단하더라구요.(저도 세르쥬 친구에 지원해보고 싶었는데 대학원 입시의 압박으로 ㅠㅠ)

소통하고자 하는 세르쥬


사용자 삽입 이미지

(C) 서울국제공연예술제, Vivarium Studio


세르쥬는 어설픕니다. 세르쥬의 공연도 어설픕니다. "세르쥬의 효과" 라는 연극도 왠지 어설픕니다. 그런데 그런 세르쥬를 보고 있으면 미소가 지어집니다.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도 세르쥬가 어느 이야기 속 멋진 주인공의 모습이 아닌 우리의 모습과 더 닮아 있기 때문 아닐까요? 그리고 소통하려고 하기 때문 아닐까요?

세르쥬는 매주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지만 그다지 활발하거나 대인관계가 썩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친구들과도 그다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구요. 다만 소통을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노력합니다. 바로 공연이죠. 공연이 썩 멋지지는 않지만요. 어쨌건 친구들은 세르쥬의 공연을 계기로 모이게 됩니다. 모여서 얘기하고 와인을 마시고 피자를 먹습니다. 어색하지만 즐거워보입니다. 왠지 훈훈합니다.

세르쥬는 관객들과도 소통을 시도합니다. '금강제화' '롯데리아' 'GS홈쇼핑' 같은 한국의 상호를 대사 속에 등장시키고, 간단한 대사는 한국말로 합니다. "빨리요" "배웅해줄게" "뭐 좀 마실래?" "코트 받아줄게" 와 같은 말들입니다. 별거 아닌데 재밌고 기분이 좋습니다. 최대한 관객 눈높이에 맞추는거죠. 현지 일반인 친구 모집도 그런 맥락일 겁니다. 실제로 객석 반응도 좋았구요. 긴 대사는 일반인 출연자가 통역하는 방식을 택해서 자막 사용도 최소화하고 있습니다.

다가가고 싶지만 어색해 하고 방법을 모르는 게 현대인의 모습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점점 단절되어가는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꼭 세련된 방법이 필요한 걸까요? 소통을 위한 노력과 마음가짐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세르쥬처럼 투박하게라도 시도해보는 게 어떨까요.


이 포스트에 쓰인 이미지는 모두 인용의 목적으로 쓰였습니다.
이미지에 대한 권리는 서울국제공연예술제, Vivarium Studio, Martin Argyroglo에 있음을 밝힙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2009/11/20 01:45 2009/11/20 01:45


  1. Phoebe
    2009/11/20 11:54
    신선하기도 하고 나름 재미도 있겠네요.^^
    • basecom
      2009/11/20 13:49
      네^^ 해외초청공연들이 좋은건 다들 한가닥하는 공연들이기때문이에요 ㅎㅎ 자막 보는 불편함이 있긴하지만.. 다 이유가 있어서 초청까지된거니까^^
  2. 모모군
    2009/11/20 13:40
    독특한 연극이겠습니다. 저도 세르쥬의 친구로 초대 받고 싶어졌습니다. ㅎㅎ
    • basecom
      2009/11/20 13:51
      제가 얼마나 세르쥬의 친구로 초청받고 싶었는지 ㅠㅠ 무대에서 피자랑 와인을 진짜로 먹는데.. 샘나더라구요 ㅎㅎ
  3. 드자이너김군
    2009/11/20 18:04
    오~ 뭔가 심오하게 재밋을것 같은.. ㅋ
    정말 리얼리티군요..+_+
    • basecom
      2009/11/20 18:08
      심오할 것 같은데 보면 하나도 안 심오해요 ㅎㅎ
      그냥 좀 어이없어서 킥킥대게 되는데
      보고나면 어? 하는 뭐 그런...^^;
  4. gemlove
    2009/11/20 21:19
    신기하네요 ㅎ 연극이라는 느낌이 안들꺼같아요 ㅎ 마치 일상생활을 제3자가 관찰하는 느낌? ㅋ 근데 소통을 시도한다고도 하니 ㅎㅎ
    • basecom
      2009/11/20 23:12
      네 맞아요. 일상생활을 제3자가 관찰하는 느낌이죠 ㅎㅎ 어차피 연극이나 모든 공연예술이 관객에게 무언가를 얘기하려고 하는 게 목적인데, 그럴려면 공감할 수 있게 해야하거든요.
      직접적으로 관객을 끌어들이거나 하는 부분은 없지만 공감대형성이라든가 하는 부분에서 소통한다고 생각했어요^^
  5. 김뽀
    2009/11/21 13:41
    색다른 공연인것 같아요^^
    저도 훈훈함을 함께 느끼고싶어요~~
    • basecom
      2009/11/21 17:12
      ㅎㅎ 세르쥬는 이미 프랑스로 돌아갔을 것 같고.. 다른 훈훈한 공연을 추천해드려야겠네요. 마침 연말이라 훈훈한 공연시즌이긴합니다 ㅋㅋ
  6. 탐진강
    2009/11/22 17:59
    좀 독특하고 재밌는 연극인 듯 합니다.
    연극을 좀 봐야 하는데 요즘은 못보고 있어요ㅠㅠ
    • basecom
      2009/11/22 18:30
      네 ㅎㅎ 해외초청작들은 기회가 있으면 꼭 보세요. 언제 다시 우리나라로 공연올지 모르니까^^
  7. 감성PD
    2009/11/23 15:06
    특이한 연극인 것 같군요...
    어색해하지만 꾸준한 소통을 하려는 모습이 좋아보여요.
    • basecom
      2009/11/23 15:57
      네 ㅎㅎ 연극에서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필요한 자세를 유머러스하게 보여주니까 참 좋았어요^^
  8. 분홍별장미
    2009/11/24 16:39
    은은한 즐거움이 있을것 같네요.
    또다른 나를 볼수있는 계기도
    될것같고^^
Leave a Comment
블로그이미지
About
basecom

Recent Trackback




420713
Today : 56   Yesterday : 116